2026-06-19
대한민국의 경제 엔진, 경남 산업의 지난 80년은 단순한 성장의 통계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땀방울이었고 가족의 생계였으며 청춘의 무대였다.
본지는 산업화의 초석을 닦은 70대 지역 경제계 원로, 현장의 허리이자 산증인인 50대 기업 관리자, 그리고 새로운 10년을 이끌어갈 20대 신입 엔지니어의 시선을 교차해 경남 산업의 어제와 오늘을 성찰했다.

70대 이상연 경남경영자총협회장
1976년, 흙먼지 가득했던 창원산단 새록
IMF 때 매출 70% 가까이 급감 위기 직면
숙련 노하우 다음 세대 연결 구조 시급
50대 김우종 대건테크 부장
도로에 ‘통근 버스’ 행렬… 사람들 분주
코로나 19·러우 전쟁 등 산업 흐름 바꿔
청년 부족·제조업 기술 잊혀 안타까워
20대 신유훈 효성중공업 엔지니어
첫 출근길, 정체됐던 창원대로 기억 남아
팬데믹 기점 공장 자동화·효율 중심 뚜렷
인재 유출·정주여건 개선 환경 구축 절실
세 번의 출근길
경남 산업의 변천사는 아침 출근길 풍경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76년, 서울에서 창원으로 내려온 이상연(76·경한코리아 회장) 경남경영자총협회장에게 창원국가산업단지의 첫 출근길은 막 성장의 동력을 키우던 현장이었다. 그러나 공장과 기반시설은 미완성이었고, 도로에는 흙먼지가 날렸으며, 곳곳에서 크레인 작업과 용접 불꽃이 밤늦도록 이어졌다. 이 회장은 “아침마다 작업복을 입은 젊은이들의 모습에는 에너지와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지금은 힘들어도 우리가 이 나라 산업을 일으킨다’는 각오와 열정이 도시 전체를 움직였다”고 회고했다.
시간이 흘러 1990년대 초 사회에 나온 김우종(52) 대건테크 부장이 기억하는 풍경은 ‘통근버스’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녔고, 도로에는 기업들의 통근버스가 줄을 이뤘으며, 버스에 타는 사람들의 밝은 모습이 곧 경남의 활기였다”고 회상했다.
반면 2025년 7월 4주 차에 첫 출근을 한 신유훈(27) 효성중공업 가스차단기개발팀 엔지니어의 출근길은 사뭇 달랐다. 그는 아침 7시 30분쯤 집에서 차를 운전해 익숙한 창원 공단 풍경을 지났다. 넓게 뻗은 창원대로가 출근 시간 정체로 붐비는 모습을 보며 그는 “이제 저 많은 공단의 근로자 중 한 명이 됐구나” 하는 뿌듯함과 자극을 받았다.
가장 뜨거웠던 그해
가장 활기를 띠던 시기를 묻는 질문에 세 세대의 기억은 각자의 황금기로 향했다. 70대 이 회장은 1970년에 문을 연 ‘마산수출자유지역’과 1980~90년대 도약기를 꼽았다. 그는 “그 시절 섬유와 전자, 봉제 공장이 빼곡히 들어선 마산은 ‘수출보국’의 상징이었다”며 “이후 1980~90년대는 산업단지의 불빛이 꺼지지 않은 가장 역동적인 시기”라고 했다.
50대 김 부장은 IMF 외환위기 직전을 꼽았다. 기계, 전자, 조선 등 모든 분야에서 발전을 하던 시기로, 그는 “모든 세대에서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던 시절”이라고 기억했다.
흥미롭게도 20대 신 엔지니어가 기억하는 활기는 주변 어른들의 기억을 통해 전해 들은 시기다. 그는 2000년대 말에서 2010년대 초반, 거제 조선업 호황기를 언급했다. “조선소 월급날이면 지나가는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 정도로 지역 분위기가 뜨거웠던 시절이다.
위기의 변곡점
경남 산업의 흐름을 바꾼 변곡점 앞에서 세대의 경험은 확연히 갈렸다. 70대 이 회장에게 1997년 IMF 외환위기는 큰 시련이었다. 매출이 70% 가까이 급감하는 사투 속에서, 그는 국민차 ‘티코’ 부품을 개발하며 돌파구를 찾았고, 생산라인 직원이 주야로 공장을 24시간 가동하며 위기를 버텨냈다.
50대 김 부장 역시 IMF 외환위기와 더불어 코로나19, 러-우 전쟁 등을 산업을 뒤흔든 사건으로 진단했다.
20대 신 엔지니어에게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단연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그는 “비교적 탄탄하다고 여겨지던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거나 도산했고, 취업을 준비하는 입장에서도 불확실성이 커지며 ‘충격’과 ‘공포’에 가까운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회상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현장에서는 자동화와 효율 중심으로 재편되는 분위기가 뚜렷해졌다.
딜레마에 빠진 거인
현재 경남 산업은 방산, 조선, 항공, 원전 등 고부가가치의 제조업이 집적돼 있다는 뚜렷한 강점을 지닌다. 하지만 세 세대 모두 가장 큰 과제로 ‘인력 부족’을 지목했다. 이 회장은 “오랜 기술력과 숙련 인력, 노사 간 신뢰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자산”이라면서도 “숙련 노하우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구조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50대 김 부장은 “젊은 사람들이 부족해 그동안 이뤄 놓은 제조업의 기술이 빠르게 사장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20대 신 엔지니어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인재 유출과 정주 여건의 한계를 꼬집으며 “문화적 선택지가 제한적이고, 제조업 중심 특성상 성비 불균형으로 연애나 결혼 등 생활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린다”고 꼬집었다. 생활 만족과 성장 기회가 함께 보장되지 않으면 지역 안착이 어렵다는 설명이다.
향후 10년의 생존 공식
그렇다면 향후 10년, 경남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 70대 이 회장은 기존 제조업 강점 위에 디지털·친환경 기술을 결합한 고부가가치 구조로의 전환을 전망했다. 방산, 항공, 원전, 스마트 제조 분야가 전문화·고도화되면서 기술 혁신과 인재 확보에 성공한 기업이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50대 김 부장은 “방산 및 항공 등의 제조업에 로봇을 활용한 생산이 대규모로 진행될 것”이라며 “소수의 인원으로 제어하는 공장이 주류를 이룰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를 위해 지자체가 중앙 부처 기관의 연구개발비에 준하는 지원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70대 이 회장 역시 AI·디지털 전환을 얹어 “‘잘 만드는 힘’ 위에 ‘더 똑똑하게 만드는 힘’을 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미래 현장의 주역인 20대 신 엔지니어 역시 기존 제조업이 스마트팩토리·자동화·로봇 도입 등을 통해 고도화되는 방식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그는 “제조가 강화된다면 핵심 키워드는 자동화, 고부가가치, 친환경이라고 본다”며 “이런 변화가 성과로 이어지려면 인재 유출을 막고, 경남에 머무를 만한 메리트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산업의 고도화와 함께, 사람이 남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10년 뒤 경남 산업의 핵심 과제라고 부연했다.
80년 뼈대 위, 새로운 10년의 열쇠는 ‘사람’
1976년 창원대로의 흙먼지를 마시며 버틴 70대, 통근버스의 활기를 기억하며 위기를 돌파한 50대, 그리고 2025년 출근길에서 커리어 전망과 정주 여건을 묻는 20대. 세대의 경험은 다르지만 결론은 하나로 수렴된다. 경남 산업 80년의 든든한 뼈대 위에 미래 10년을 준비하는 핵심은 결국 ‘사람이 남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대규모 투자와 기술 혁신도 중요하지만, 그 기반에는 지역에서 꿈을 꾸고 정착할 청년이 있어야 한다. 청년들이 수도권으로 떠나지 않아도 지역 안에서 문화와 생활 인프라를 누리며 커리어를 키우고, 꿈을 키워갈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경남 산업의 지속 가능성은 결국 사람을 중심에 두는 정책, 그리고 인재를 붙잡아 두는 전략에 달려 있다.
글= 경제부 종합·사진= 전강용 기자